『나의 서양미술 순례』 이후 20년,
디아스포라 서경식의 또 다른 미술 순례기
한국의 많은 독자들이 서경식이라는 이름을 저자로서 기억하게 된 것은 1993년 번역 출간된 『나의 서양미술 순례』 덕분일 것이다. 이 책은 이제는 너무 많이 쏟아져 나와 거의 하나의 분야로 자리 잡은 ‘미술 기행’의 거의 첫 출발에 해당하는 책이었고, 지금까지도 꾸준히 판매되는 몇 안 되는 미술 기행기이기도 하다.
많은 독자들이 『나의 서양미술 순례』를 통해 그림 읽기의 새롭고도 친근한 방법을 배웠다고 고백한다. 조국에서 옥살이를 하는 형들(서승, 서준식)의 옥바라지를 하는 30대의 재일조선인 청년에게 유럽의 다양한 미술관에서 만난 작품들은 지하실에 난 창문으로 겨우 들어오는 희박한 공기였다고, 저자는 그 책에서 기록한 바 있다. 예술이 역사와 현실과 삶과 독특하게 뒤섞이며 서로를 해석하거나 확장하는 놀라운 장면들이 그 책에 가득 담겨 있었다.
이번에 출간되는 『나의 조선미술 순례』에서 저자는 이제 60대가 되어 유럽의 미술관이 아닌 한국의 미술관들을 순례한다. 30대의 재일조선인 청년이 집착했던 주제들, 죽음, 섹슈얼리티, 가족, 민족…… 같은 것들이 여전히 60대 재일조선인 노교수의 눈과 귀와 온갖 감각들을 사로잡고 날카로운 통찰들을 이끌어낸다. 하지만 시간과 공간과 삶의 변화를 따라 미묘하게 달라진 지점들 역시 드러난다.
가령 저자는 이제 홀로 유럽의 미술관을 돌아다니며 작품과 고독하게 마주하는 것이 아니라, 아내 F와 함께 때로는 제자들과 함께 ‘조국’의 미술관을 찾는다. 그리고 정말로 원한다면 그 작품을 만든 작가들과 직접 한국어로 대화를 할 수도 있다. 조국은 더 이상 그가 70년대에 보았던 군사독재 치하의 가난한 나라가 아니다. 또 이제 형들의 옥바라지를 위해 조국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연구와 활동을 위해 찾게 되었다. 이렇듯 달라진 상황에서 저자는 20년 전, 30년 전 그림들 앞에서 던졌던 것과 똑같은 물음을 던진다.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누구인가?’
이번에는 이 물음들에 답할 수 있을 것인가? 저자는 이전에는 단순히 목격자에 머물 수 있었던 독자들을 이번 순례에는 더 깊이 동참시킨다. 위의 답을 혼자서는 도저히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20~30년 전의 그 순례와 지금의 이 순례의 미묘한 차이들을 읽어내는 것은 작가 자신의 변화를 읽어내는 일일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나 자신의 변화를 읽어내는 일이 된다.
한편 『나의 서양미술 순례』와 『나의 조선미술 순례』를 나란히 놓고 보는 일은 마치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 나란히 걸린, 렘브란트의 34세 때와 63세 때의 자화상을 보는 일 같기도 하다. 많은 것이 달라졌지만 삶의 질문, 궁극의 질문에 대한 답을 갈구하는 그 빛나는 눈은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책을 펴내며
긍지 높은 촌놈 / 신경호
완고한 맏아들 / 정연두
우아한 미친년 / 윤석남
분열이라는 콘텍스트 / 이쾌대
성별조차 초월한 이단아 / 신윤복
이름이 많은 아이 / 미희=나탈리 르무안
부록
사람이 아름다웠다 / 홍성담
그녀의 붓질 / 송현숙
후기를 대신하며
옮긴이의 글
우리/미술 사이에 빗금을 긋다
저자 서경식은 재일조선인 지식인으로서 점차 우경화하는 일본의 국민주의와 극우 내셔널리즘을 예리하게 비판해왔다. 또 그는 ‘재일교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20년 가까이 옥고를 치른 서승·서준식의 동생으로 국가주의적 폭력의 생생한 증인이기도 하다. 그는 이러한 차별과 배제의 경험을 ‘디아스포라’라는 더 보편적인 정체성으로 확장시켜왔다. 그리고 이 책에서도 그런 정체성을 바탕으로 ‘한국 미술’이라는 자명해 보이는 개념에 균열을 일으킨다. 저자가 굳이 ‘한국 미술’이나 ‘우리 미술’이 아닌 ‘조선 미술’이라는 표현을 고집한 것도 이런 독특한 관점을 드러내기 위해서였다.
이 책은 집단적 미의식의 문제에 골몰하면서, 예술이 배타적인 ‘국민화’의 도구가 아니라 차별과 배제의 부조리를 날카롭게 드러내는 도구가 되는 순간들에 대해 탐색한다. 나아가 그러한 성찰과 긴장을 통해, ‘한국 미술’이 더 열린, 더 보편적인 공동체성을 사유하게 만드는 상상력의 원천이 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도 숙고한다. 이 과정에서 전통과 근대의 문제, 리얼리즘의 문제가 다양하게 거론되고, 또 서양과 일본의 다양한 미술적 사건들이 참조점을 제시한다. 그래서 이 책은 ‘한국’ 미술 기행이지만 ‘디아스포라’의 관점에서 ‘민족’ 미술의 진정한 의미를 찾아가는 독특한 순례가 된다.
‘조선’이라는 용어를 고른 또 하나의 이유는, 이 말이 ‘학대’를 받아온 호칭이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나고 자랐던 나에게는 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민족의 호칭은 식민지 지배 과정에서는 차별의 멍에를 지게 되었고, 민족 분단 과정에서는 이데올로기의 짐을 떠안았다. 그리하여 우리는 ‘조선’이라는 말을 입에 담을 때 긴장과 불안, 때로는 공포마저 느껴왔는데, 이 역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의 정직한 반영이다. 나는 억울함을 당한 이 호칭을, 그것을 말하지 못하게 하는 ‘학대’에서 더욱 구출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학대의 원인을 없애지 않으면 안 된다.(10쪽)
‘우리 미술’이라는 개념이 형식화되고 고정되면 쉽사리 권력으로 변한다. 가령 어떤 언어를 자유롭게 사용하는 자만이 ‘우리’이며 ‘우리’란 어떤 특정한 언어를 공유하는 사람들이라는 순환논리는 배타적인 자의식을 공고히 한다. ‘언어’를 ‘미의식’으로 치환해보면 ‘우리 미술’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지닌 위험성을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국어’와 마찬가지로 미술학교, 미술관, 공공 전시회, 미술 시장의 형성 등을 통해 만들어진 ‘미술’이라는 제도 역시 근대 국민국가의 산물이며 국가주의와 깊숙하게 연결되어 있다. 나치 독일도, 천황제 국가 일본도 저들이 이해하는, 저들만의 ‘우리 미술’을 자민족 중심주의 이데올로기의 핵심으로 구축해갔다고 볼 수 있다. ‘우리 미술’이라는 말에 굳이 칼집처럼 빗금을 넣어 ‘우리/미술’로 표기하려 했던 이유는 거기에 있다.(11~12쪽)
이번 ‘우리/미술 순례’를 쓰기 시작하면서 첫 번째로 신경호 선생을 등장시킨 것은 나에게 가장 친근한 한국의 미술가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단지 그뿐만은 아니다. 그의 분위기, 말과 행동이 무척 흥미로운 수수께끼로 가득 차 있어 어쩌면 ‘민족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 그 자체가 그에게 체현되어 있는 듯 여겨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5?18의 생생한 증인이기도 했다. ‘5?18을 어떻게 봐야 할까’, 또는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는 ‘우리/미술’에서도 피할 수 없는 과제임에 틀림없다.(23쪽)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는 표현이겠지만, 나는 그의 작품을 보고 무척이나 ‘한국적’이라고 느꼈다. 「보라매 댄스홀」 , 「상록타워」 에 등장하는 평범한 시민들의 표정과 자세, 복장에서 드러나는 취향, 이 모든 것이 뭐라 말할 수 없이 ‘한국적’이었다. 목소리가 들리고 냄새마저 느껴진다. 정연두의 작품은 현대 ‘한국인’의 초상이자 한국 사회의 자화상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전형적으로 ‘한국적’인 것을 선택하여 카탈로그 사진을 찍으려 했을 리는 없다. 그는 피사체인 인물에 흥미와 애착을 느끼지만, 대상에 정서적으로 일체화되지 않으면서 차가운 객관성을 잃지 않고 관찰한다. 그런 애착과 객관성의 미묘한 균형이 ‘정연두다움’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121쪽)
이쾌대는 「군상」을 그리면서 동시에 「푸른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을 그렸다. 이 두 점은 같은 화가의 작품으로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서로 다른 인상을 전해준다. 집단과 개인, 서양화의 정통적인 묘사법과 조선의 민족적 묘사법, 두 가지가 이쾌대라는 한 사람의 화가 속에 분열된 채로 상극相克하고 있다. 그 어느 한쪽이 이쾌대인 것이 아니라, 이렇게 분열된 존재가 바로 이쾌대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두 작품은 아직 발전도상에 있는 미완의 습작이었다고 할 수 있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지만 해방 후 조선이 분열도 전쟁도 경험하지 않았다면, 이쾌대가 평화롭고 안정적인 통일된 사회에서 살아갔다면 어땠을까? 분열은 행복으로 지양止揚되어 새로운 ‘주체’에 의한 새로운 ‘표현’을 창조할 수 있었을까? 하지만 지금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뿐이다. 이쾌대에게서 보이는 분열상은 근현대를 거치며 조선 민족에게 던져진 콘텍스트 그 자체의 충실한 반영이었다.(235쪽)
강조해서 말하자면 신윤복의 성별을 둘러싼 ‘사실’이 어떠했는지가 문제는 아니다. 그 작품이 우리를 시대를 뛰어넘는 자유로운 상상, 그리고 ‘성별’조차 넘나드는 상상으로 이끌어준다는 점이 중요하다.
신윤복은 분명 ‘이단아’였다. 어쩌면 콤플렉스에 사로잡힌 유약한 성격의 소유자였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바로 그 때문에 형식화形式化된 전통을 고수하지도 않고, 또 외세에 의해 강제된 ‘식민지 근대’의 미망에 빠지지도 않고, 진정한 근대를 향한 어렴풋한 가능성을 선취했던 것은 아닐까?(283쪽)
미희가 미희인 까닭은 그녀가 어느 날, 부산의 길가에 버려져 한국 정부가 추진한 입양 제도에 의해 벨기에로 보내졌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우리’의 아프고도 부끄러운 역사가 남김없이 투영되어 있다. 이름, 말, 문화, 습관, ‘한국적’이라고 여겨지는 이런 지표의 거의 대부분을 상실한 이유는 미희가 ‘우리’이기 때문이다. 민족이란 그러한 문맥까지 함께 공유한다는 의미가 아닐까? 미희를 ‘우리’로 인정하고 그 미술을 ‘우리 미술’로 포함한다는 생각은 ‘우리’의 쇠퇴가 아니라 ‘우리’라는 개념 자체의 변혁과 확장을 의미한다. 그것이 우리들이 살아가는 현실과도 합치한다.
디아스포라는 결코 애처로움이나 동정의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안주하고 있는 ‘국민, 인종, 문화의 동일성’이라는 관념이 얼마나 허구에 차 있으며 위험한가를 일깨워주는 존재일 따름이다.(327쪽)
이 책에서 다룬 작품들과 작가들
신경호 작가는 마치 저자 자신의 분신(저자는 ‘사촌’이라 표현했다.) 같은 인물이다. 서경식이 한국에서 태어나 자랐다면 같은 시기에 같은 곡절을 같은 모습으로 겪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같은 시기에 태어나 같은 사건들에 영향을 받았지만 지금은 너무나 다른 모습과 다른 성향을 지녔다는 점에서 더 그렇다. 이런 이유로, 정작 한국인들에게도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임에도, 저자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조선 미술에 대한 순례를 신경호 작가의 작업실에서 시작한다.
그 후로 몇 번을 만났지만 손님을 대접하고 맛있는 음식을 소개해주는 것이 신성한 의무라고 생각하는 듯, 언제나 송구스러울 정도의 최상급 예우를 갖췄다. 특히 식사 시간이 되면 신 선생은 무슨 어려운 문제에라도 부딪힌 양 심각한 얼굴을 하고 생각에 잠겼다. 어떤 가게에서 무엇을 대접하면 가장 좋을까를 혼신을 다해 숙고하는 모습이었다. 덕분에 홍어, 굴비, 흑염소, 떡갈비, 추어탕, 청국장, 굴전, 오리구이… …. 재일조선인인 나로서는 좀처럼 먹을 기회가 없었던 맛있는 음식을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21쪽)
담양에 있는 작업실은 크고 작은 작품들로 꽉 들어차 있었다. 내가 받은 첫인상은 감격이나 충격은 아니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당혹스러웠다. 그 작품들은 내 머릿속에 있던 민중미술의 개념, 즉 오윤, 홍성담, 신학철, 걸개그림 등으로 형성된 이미지와 들어맞지 않았다.
노란색 개가 초승달을 향해 짖고 있는 그림 「넋이라도 있고 없고 : 남아평생도 1979」가 먼저 눈에 띄었다. 단순한 구도와 색채가 재미있었다. 그 그림을 바라보고 있자니 신 선생은 싱긋 웃으며 “(개의) 자지가 발기하고 있습니다.”라고만 말했다. 나는 어떤 말로 답을 해야 할지 몰라 그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었다. 그 말을 듣고 주위를 둘러보니 남녀의 성기 같은 도상이 많이 그려져 있었다. 혼란스러웠다.(29쪽)
신경호 선생은 나이로 치면 나보다 한 살 위이지만 일본이라는 장소에 갇혀 있던 나와는 어떤 접점도 없었다. 거의 동시대를 다른 문맥에서 살아온 이 인물의 학창 시절에 대해서 알고 싶어졌다. 어떤 경위로 ‘민중미술’에 참여하게 되었을까도 궁금했다.(30쪽)
아! 그랬구나, 이 사람도 나와 마찬가지로 ‘죽음’에 매달리고 있구나라고 느꼈다. 나는 30대 초반부터 유럽 각국의 미술관과 성당을 돌며 그곳에 넘쳐났던 죽음의 도상에 매혹되었고 다름 아닌 ‘죽음’에 매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와 거의 같은 세대의 한국 미술가가 나처럼 죽음에 매달리게 됐다면 바로 거기에서 우리 두 사람의 접점을 찾아낼 수도 있으리라, 어쩌면 이야기가 통할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도록을 넘기며 아무리 바라봐도 나의 뇌리에 있는 (이를테면 아르놀트 뵈클린 또는 에곤 실레와 같은) 죽음의 도상을 찾아내는 일은 불가능했다.(37쪽)
신경호 선생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마치 근대 이전의 사람과 대면하고 있는 듯한 기묘한 감상에 사로잡혔다. 오해는 없으리라 생각하지만 노파심에 덧붙여두자면 나는 여기서 ‘근대화’를 무조건 긍정하는 것이 아니다. 즉신 선생은 ‘뒤처졌고’ 내가 ‘앞서 있다’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비유하자면 이런 것이다. 이름만 들었을 뿐 만난 적 없는 먼 ‘사촌’과 우연히 만났다고 해보자. 다른 환경에서 자라나 이제는 죽음에 대한 관념조차 달라져버렸기에 언제부터 어떻게 이런 차이가 생겨났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긴다는 것이다. 이는 또한 나 자신을 바로 아는 데에도 도움이 되는, 무척이나 흥미로운 생각들이다. 기묘한 감상이란 바로 그러한 감정을 의미한다. 동시대를 살아온 같은 민족인데도 한쪽은 국내의 호남이라는 지역에서 성장하고 다른 한쪽은 식민지 종주국 일본의 디아스포라로서 자랐다. 서로가 몸을 두었던 문맥의 차이가 이 같은 감각의 차이, 생사관의 차이를 가져왔다. 나는, 나라는 인간이 ‘식민지 지배’라는 ‘근대화’의 과정을 거치며 ‘근대 이후’라는 망막한 공간에 내팽개쳐진 존재라는 점을 다시금 절감하는 것이다.(44쪽)
나는 신 선생의 작품에 큰 흥미를 느낀다. 하지만 그 끌림은 자신의 ‘근원에 내재하는 리얼한 것’과 ‘우리의 전통에 숨 쉬는 미감’을 발견했다는 기쁨과는 조금 다르다. ‘내가 잃어버리고 만 것은 이런 것이었던가… ….’ 하는 생각에서 오는, 이미 잃어버린 리얼리티를 거슬러 올라가 탐색하고 재구성하기 위한 흥미이다.(59쪽)
정연두 작가는 저자가 인터뷰한 작가들 중 가장 젊은 축에 속하는 스타 작가다. 저자에게는 가장 ‘한국적인 작가’로 꼽힌 작가이기도 하다. 정연두 작가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독특하게 다루는 어떤 종류의 ‘외로움’이 디아스포라의 시선에서 가장 정겹고 따뜻하게 느껴졌다는 아이러니는, 한국 미술이 무엇일까, 우리 미술이 무엇일까라는 이 책의 핵심적인 물음에 대한 답의 실마리를 던져주는 듯하다.
평소 나는 ‘변신’에 대한 열망이라든가 ‘마법사’가 등장하는 이야기에 냉담한 편이다. 그런 만화나 애니메이션에도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천천히 작품을 보고 있자니, 학생들의 발걸음을 붙잡았던 그 힘에 의해 냉담한 내 안에서도 알 수 없는 애착이 싹트기 시작했다. 아마 피사체의 표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두 사진 모두 웃음기가 없고 현실적이면서 꽤 굳은 표정이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씩씩하게 살아가는 생활인으로서의 젊은이 상이 거기에 있었고, 서툴고도 애처로운 꿈을 담은 모습 또한 거기에 있었다. 리얼리즘만도 아니고 판타지만도 아니었다. 학생들이 매료되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 아니었을까.
‘정연두’라는 작가를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별다른 근거는 없었지만 분명 차가운 사람은 아니리라는 확신도 들었다. 작가에 대한 그런 인상 역시 그의 작품을 통해 전해졌음이 틀림없다.(79쪽)
(정연두:) 그런데 1999년에 의약분업이 시행되었어요. 의사와 약사를 분리하려는 정책이었죠. 저희 아버지 같은 분은 더 이상 환자를 만나 처방을 내릴 수 없게 되었죠. 아버지는 한약과 양약 양쪽에 다 걸쳐 있으니까 한쪽을 선택하라는 압력을 받으시곤 아예 약사를 그만두셨어요. 이른 나이에 은퇴하신 셈인데 제가 미술을 전공하겠다고 했을 때 아버지는 크리스털 재떨이를 저에게 던지시며 “약을 짓는 것처럼 사람을 낫게 하는 일을 해야지!”라고 크게 화를 내셨죠. 아버지는 제가 의학 쪽 일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셨고 실제로 저도 고등학교까지는 이과였어요. 재떨이는 그냥 잘 피했어요. (웃음)(99쪽)
저는 딱히 한국적이고자 노력해본 적은 없고, 그렇다고 한국 작가가 아니라고 강조해본 적도 없어요. 어떤 면에선 추세라고 할 측면도 있는 것 같아요. 예컨대 외국의 큐레이터가 일부러 한국까지 비행기를 타고 와서 “극동의 진흙 속에서 진주를 찾아냈어!”라고 기뻐했는데 알고 보니 그 작가가 얼마 전, 바로 지난달까지 뉴욕에서 유학 생활을 했던 사람이라면 아이러니하지만, 웃기잖아요? 그게 요즘 현실인 것 같아요.
저는 한국 출신 작가가 “한국의 예술은 이러한 변별력이 있어 외국과는 다릅니다.”라는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듣는 사람은 오히려 하품을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내 것을 강조하기보다 결국은 개별적인 문화에서 생산된 작품이 정말 가슴에 와 닿아서 그것이 무엇인가를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쪽이 중요하고 효과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요.(106쪽)
정연두: 이 작업은 서로 다른 여섯 민족에 대한 이야기인 듯 보이지만 한편으로 중요한 포인트는 배경이 다름 아닌 바로 뉴욕이라는 점이에요. 다루고 있는 내용이나 소재, 즉 우리가 코리아타운, 차이나타운이라고 인식하는 것을 떠나서 그냥 뉴욕이라는 점이 중요하기도 해요. 도시라는 공간이 사진처럼 순간으로 정지되어 있을 때, 저곳의 한 사람, 한 사람이 갖고 있는 고통, 고립, 외로움 같은 찰나를 잡아내서 극대화시킬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런 의도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서로를 알 수 없는 타인과 이방인만으로 구성된, 바쁘게 돌아가는 도시의 거리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이 만들어내는 드라마라고 할까요
서경식: 네, 저 역시 이 작품에서 그런 외롭고 쓸쓸함을 느꼈습니다. 「보라매 댄스홀」 과는 정반대 지점에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특히 우리 긴 대화의 마지막에 외로움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107~108쪽)
윤석남 작가와는 ‘위안부 문제’라는 공통의 관심사를 각각 여성과 재일조선인이라는 관점에서 공유함으로써 독특한 관계가 설정된다. ‘가족’의 언어로 환원해서 말하자면 ‘어머니’에 대한 서로 다르지만 또 비슷한, 존경과 사랑 역시 대화의 전제가 된다. 이들의 어머니들이 공유한 다양한 역사적 고통들을 자식의 입장에서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공감하려고 노력하는 시도가 재일조선인 남성 지식인과 한국 현대 미술을 대표하는 여성 작가를 연대하게 한다.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는 차이 역시 이 책의 중요한 주제이기도 하다.
일상 속 아주 작은 균열로부터 얼굴을 내미는 광기, 덧없는 안정감을 뿌리로부터 흔들며 위협하는 위기, 하지만 어쩐지 보는 사람을 끌어들일 수밖에 없는 불가해한 힘을 숨기고 있는 것. 그리스 신화의 메두사가 현대에 나타난다면 이런 모습이지는 않을까? 이 사람은 누굴까, 어떤 인생을 살아왔던 것일까? 그런 흥미를 억누를 수 없었다. (…) 나와 눈을 마주쳤던 것은 실제의 여성이 아니다. 사진작품이다. 사진가 박영숙의 「미친년 프로젝트」 중 하나이다. 이 정도로 강렬한 작품이 실현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작가의 힘 때문이었겠지만 피사체의 존재감 역시 중요한 역할을 했음에 틀림없다. 「미친년 프로젝트」 의 후속 작품 가운데 이 작품을 뛰어넘는 것은 본 적이 없다는 것이 그 증거다. 피사체가 된 여성은 대체 누구일까? 당시에는 아무것도 몰랐지만 나중에 그 여자와 나는 아는 사이가 되었다.(127~128쪽)
(윤석남:) 저희가 세 자매이고, 밑으로 남동생들이 있어요. 6남매인데 막내와 저는 절대적인 ‘어머니 신봉자’예요. 언니는 아주 머리가 좋았고 공부도 잘했는데 아버지와 가까웠지요. 언니는 아직도 어머니에 대한 끈끈한 애정이 없어요. 보통 여성의 힘을 막연하게 얘기하는데 저는 모성의 힘, 여성의 힘이란 결코 막연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버지에게 없는 어머니의 힘이란 자신의 몸을 통해 아이를 낳은 데서 오는 것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주류로서 살지 못해 쌓인 정신적 갈등이 몸에 축적된 데서 나오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남에 대한 동정심이나 포용력이 남성보다 훨씬 더 크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피해와 억압을 받아봤기 때문에 더 넓어진 거죠.(144쪽)
인터뷰 자리에서 ‘앵포르멜Art Informel’이라는 용어를 이런 식으로 만난 것은 나에게 의외의 일이었다. (…) 그러므로 앵포르멜은 정치적 주제를 직접 표현하는 것이 아닐지라도 전쟁이라는 가혹한 현실을 배경으로 현대의 ‘인간의 조건’을 냉엄히 되묻는 지점에서 출발한 예술양식이라 할 수 있다. 장 포트리에와 장 뒤뷔페 등 제2차 세계대전의 파괴와 살육을 경험한 앵포르멜 화가들은 거의 형태를 잃은 인간상을 그림으로써 인간 자체에 대한 부정을 포함한 치열한 주장을 펼쳤다. 또 뒤뷔페는 정신장애인들의 예술, 아르 브뤼Art Brut에 강한 공감을 표하기도 했다. 바꿔 말하면 종래의 서구미술이 가진 전통적 가치관에 이의를 제기하며 ‘광기’의 예술적 가치를 단호히 지지했던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잘 알 수 있듯 앵포르멜은 본디 저항의 예술이다. 적어도 내가 가진 상식에서는 그렇다. 그런 앵포르멜이 현대 한국에서는 본래의 맥락에서 떨어져 나와 양식으로서 수용되었고, ‘저항’이 아닌 ‘권력’으로 전화했다는 말이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우리/미술이라는 테마를 생각하기 위해서 피해 갈 수 없는 문제 중 하나가 이 지점에서도 얼굴을 내비친다.(155~156쪽)
질문을 듣고 윤석남 선생은 또 후후, 하며 미소 지었다. 우아한 웃음이다. 남자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는 웃음이다.
“그렇다고 해도 상관이 없죠. 그럼 제가 실패한 것이겠지만요.”
“내가 실패했다.”라고 하면서도 그녀의 표정은 상냥하게 정반대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생각되기도 했다. ‘그렇겠지요. 남자인 당신으로서는 알수 없겠지요. 딱하지만… ….’
긴 인터뷰를 끝내고 나는 윤석남이라는 화가를 제법 이해하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정말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걸까? 나는 여성이라는 존재에 대해 실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은 아닐까?(177쪽)
이쾌대를 다룬 장은 거의 논문과 같은 진지한 형식으로 씌어졌다. 이 장에서 저자는 유럽에 기원을 둔 서양미술사를 단선적인 발전과정으로 파악하면서 그 척도에 맞춰 우리가 얼마나 뒤쳐져 있었는지를 한탄하거나, 거꾸로 그런 시각에 반발해 그 척도에 맞춰 우리가 얼마나 선진적인가를 입증해내려는 입장이 얼마나 유사한 오류를 범하는 것인지 치밀하게 따져본다. 이쾌대가 일본을 통해 배운 서양적 기법과 근대적 주체의식에 내재된 가능성과 위험을 따져보는 것, 그리고 이쾌대가 그려낸 부조리와 분열을 가감없이 읽어내는 이 글은 우리 미술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답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듯한 인상을 준다.
그 물음에 최선을 다해 대답하던 중 갑자기 떠오른 생각은 바로 눈앞에 보이는 저 작품, 「초상을 위한 습작」 이 1949년에 제작되었다는 사실이었다. 평소라면 별 뜻 없이 지나쳐버렸을지도 모를 그 연도가 내 마음을 붙잡았다. 1949년은 이쾌대가 해방 후 남한에서 「군상」을 발표했던 바로 그해가 아니던가. 평소 나는 베이컨과 이쾌대가 작품을 제작했던 시기를 나란히 놓고 생각해보았던 적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 다시 보니 20세기 두 차례 세계대전을 겪으며 베이컨이라는 서양화가가 그리스 로마 시대부터 르네상스를 거치며 유럽 미술에서 형성된 신체(와 그 미학적 이데올로기)의 해체라는 과제와 맞붙어 싸우기 시작한 바로 그때, 조선에서는 이쾌대가 정통 미술해부학의 이론과 기법을 동원하여 인체 군상도와 씨름하고 있었던 것이다. 베이컨은 1909년 아일랜드에서 태어났고 이쾌대는 1913년에 태어났다. 거의 같은 세대 인물이다. 한쪽은 해체, 한쪽은 구축. 이는 어떤 의미이며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까?(181쪽)
일본의 패전에 의해 식민지 지배에서 해방된 조선인은 드디어 집단적 주체를 주어로 삼아 말할(그릴) 가능성을 손에 넣었다. 일제시대에는 그릴 수 없었던 역동감 넘치는 대화면의 공적 회화를 그릴 ‘주어’를 획득했던 것이다. 아니, 획득해야 했다고 말하는 편이 좋을까. ‘주어’를 손에 넣어야 했지만, 현실은 그렇게 펼쳐지지 못했다. 해방공간에서 이쾌대가 일제시대에 축적했던 지식과 기량 모두를 쏟아부어 「군상」 과 씨름했던 심정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리고 거기에 일본 전쟁화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음도 불가사의하지 않다. 그렇지만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비극’이라는 상투적인 문구로 표현하고 싶지는 않지만 첫 번째 비극은 형성되어야만 할 집단적 주체(주어)가 분단되고 분열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다. 이쾌대가 해방공간에서 벌인 다양한 활동, 그리고 월북으로까지 이르게 되는 경위는 분열될 수밖에 없었던 주체의 비극을 보여준다. 그 분단은 현재도 지속되고 있다.(228~229쪽)
신윤복을 다룬 장은 뜻밖에도 「바람의 화원」이라는 드라마로 18세기 후기 조선 회화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고조시킨 이정명 작가와의 인터뷰를 통해 진행된다. 신윤복의 회화에 대해 전문적 학식을 가지지는 않았지만 이들은 신윤복의 그림들에 즉각적으로 반응할 수밖에 없었던 자신들의 경험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음으로써 신윤복의 회화에 대한 색다른 이해로 독자들을 이끈다.
전시된 그림들을 본 순간 F는 황홀하여 멍한 표정으로 “아, 예뻐… …. 침이 흐를 것 같아… ….”라고 중얼거렸다. 젊은 재일조선인 L은 유리 케이스에 이마가 달라붙을 정도로 다가가 작품을 응시했다. 그녀가 이런 그림을 볼 기회는 지금껏 거의 없었을 터이다. 본 소감을 물었지만 말이 곧바로 나오지 않는 듯했다. 무리도 아니다.(241쪽)
브뤼헐이 꽃피워낸 플랑드르의 풍속화는 얀 스테인에 의해 더욱 융성해졌고 그 말미는 얀 페르메이르가 장식했다. 조선의 풍속화가 신윤복은 브뤼헐보다는 극적 구도의 분방함에서는 얀 스테인과, 색채의 아름다움의 측면에서는 페르메이르와 통한다고 생각된다. 18세기 조선에도 이런 탁월한 풍속화가들이 활동했다니 놀랄 만한 일이다. 하지만 단원과 혜원 두 사람 모두 인생의 마지막 장이 구름이 낀 듯 명확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통해 그들이 예외적인 혁신자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251쪽)
이는 아마 조선에서도 마찬가지였을 터이다. 전통 화가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도 우리 대부분은 자연스레 남성을 상정하곤 한다. 그래서 소설을 구상할 때부터 화가가 실제로는 여성이었다고 설정한 후에 비로소 써나갈 수 있었다는 이정명 작가의 술회는 흥미롭다. 그러한 설정을 생각하게 된 밑바탕에는 아무 예비지식 없던 어린 시절, 담뱃갑의 그림을 보며 화가가 여성임에 틀림없다고 확신했던 경험이 자리한다. 왜 그렇게 확신했던 걸까? 이 그림 자체가 ‘작가는 남자다!’라는, ‘화가가 지닌 섹슈얼리티’의 기운을 그다지 발산하지 않았기 때문은 아닐까?(268쪽)
신윤복이 그린 「미인도」 속 여성이 ‘성적 상품화’에서 완전히 벗어 있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그 점은 카샛이 그린 하녀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림이 지닌 넘치는 매력이 형식화, 기호화된 여성상과는 다른 인상을 주는 점만은 확실하다. 소설 속 김홍도는 「미인도」 를 보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림 그리는 화인을 앞에 두고 마치 옆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거침없는 몸짓이구나.”(280쪽)
미희는 저자의 이전 저작들에도 여러 번 등장한 적이 있는 아티스트이다. 저자와 ‘디아스포라’로서의 정체성을 가장 깊이 공감하는 아티스트이기도 하다. 이번 순례에서 그는 미희와 함께 미희가 입양되기 전까지 머물렀던 고아원을 찾기도 하고, 더 내밀한 가족사를 공유하기도 한다. 두 사람이 함께 반만 이루었던 꿈에 대해 회고하기도 한다. 그리고 미희를 ‘우리 미술’의 범주로 끌어들이는 일이 ‘우리 미술’이라는 개념을 변혁하는 일이 되리라고 강조한다. 이런 미희가 이 책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이치일 것이다.
심포지엄 다음 날, 따뜻하고 맑았던 오전에 나는 미희와 함께 어느 고아원을 찾았다. 40여 년 전, 미희는 그곳에서 하룻밤을 지낸 후 다른 고아원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거기서 벨기에로 보내졌다. 이번에 미희가 부산대의 심포지엄 참가를 기회로 이 고아원을 방문했던 것은 그 기억이 그리웠기 때문은 아니다. 다른 해외 입양인의 친부모를 찾기 위해서였다. 우리를 맞이했던 수녀에게 미희는 예의 바른 태도로 이런저런 질문을 건넸지만 그다지 성과를 얻지는 못했던 것 같다.
고아원을 떠날 때 미희는 종이 한 장을 손에 들고 문 앞에 섰다. 종이에는 ‘6261’이라는 ‘입양번호’가 적혀 있었다. 미희를 입양 보낸 단체가 붙인 번호다. 그 단체가 해외로 보낸 6261번째의 입양아라는 의미이다. 비슷한 일을 하는 단체가 몇 개인가 더 있다고 한다. 미희는 그 번호를 손목에 문신으로 새기는 장면을 촬영한 영상작품도 제작했다. 미희는 행위예술가다.(288~289쪽)
“어느 날 동생에게 ‘너는 중국인이지만, 나는 백인이야!’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확실히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은 길게 찢어진 눈을 한 동양인의 얼굴이었어요. 하지만 동생도 한국인 입양아여서 저와 다를 바 없는 동양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기에 사실 기묘한 트집이었습니다. 그 무렵부터 저는 제가 유럽 사회에서 우리 스스로를 어떻게 표상할까라는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고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양부모는 제가 출생에 관한 것들을 빨리 잊고 100퍼센트 벨기에인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무리였죠.”(296쪽)
언젠가 미희와 함께 과천의 국립현대미술관을 다녀온 후, “당신의 꿈은 뭐죠?”라고 물었다. 미희는 “코리아,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아르메니아, 그 밖의 모든 디아스포라 아티스트를 한자리에 모은 국제 미술 전시를 실현하는 것.”이라고 답했다. 내가 품고 있던 꿈과 놀라울 만큼 일치했다.
다음 해인 2004년 11월 27, 28일 이틀간 내가 실행위원장을 맡아, 근무하고 있는 도쿄케이자이대학에서 ‘디아스포라 아트의 현재: 코리안 디아스포라를 중심으로’라는 국제 심포지엄과 전시를 열었다. 참가한 아티스트는 미국의 영순 민, 캐나다에서 온 데이비드 강, 독일의 송현숙, 재일조선인 작가 오하지, 황보강자, 일본의 시마다 요시코, 다카야마 노보루(다카야마의 부친은 조선 출신이다.)를 비롯해 도쿄에 있는 조선대학 미술과의 연구생, 그리고 미희였다. ‘디아스포라 아티스트를 한자리에 모은 국제 미술전시’에는 한참 미치지 못했지만, 그래도 우리 꿈은 아주 일부분이나마 그렇게 실현될 수 있었다.(299쪽)
미희의 친아버지가 일본인이라면 미희는 적어도 반은 ‘일본인’의 혈통을 이어받고 있는 셈이 된다. 아이덴티티와 관련된 고뇌를 극복하기 위해 자신의 ‘혈통적 뿌리’를 밝혀내고 싶은 바람이 입양인들 사이에 공통적으로 존재한다면 미희의 경우는 그 핏줄 찾기가 결과적으로 새로운 고뇌와 고립을 초래한다고 할 수 있다. ‘혈통’의 동일성, 즉 ‘피를 나눈 우리’라는 환상공동체로 복귀하려는 것 역시 미희에게는 이미 불가능하다.(32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