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피: 불안, 권태, 도피, 수치심, 의지, 욕망…… 현상학이 사유한 우리 삶의 생생한 체험!
부제: 현상학의 흐름으로 보는 현대 프랑스 사상
기획 한국현상학회 | 글 최재식, 송석랑, 지영래, 서동욱, 김화자, 신인섭, 이양수, 이은정, 김상록, 손영창, 김동규
출판사: 반비
발행일: 2014년 12월 8일
ISBN: 978-89-8371-709-2
패키지: 반양장 · 신국판 152x225mm · 272쪽
가격: 19,000원
분야 철학
사르트르와 레비나스를 지나 데리다와 낭시까지,
권태와 불안을 넘어 타인의 얼굴과 마주한 공동체까지,
프랑스 철학의 위대한 오늘을 만나다!
“오늘날 암울한 벽으로 가로막힌 현실 속에서 사람들은 아버지가 남긴 지혜의 주머니를 끌러보듯 인문학 책과 강의실을 찾는다. …… 철학이 바로 그 인문학의 뼈대가 되고 방법론과 지향점에 자양분을 공급해준다고 할 때, 프랑스에서 전개된 ‘현상학적 철학’은 단연 그 가장 풍부한 원천이다. ‘현상학’이라는 명칭 자체가 비전공자들에게 어렵게 느껴질 수 있다는 점에도 불구하고, 매우 역설적이게도 이 학문의 내용이 다른 어떤 학문보다도 우리의 삶에 구체적으로 밀착해 있는 까닭에 그럴 것이다. 불안이나 권태, 애무나 수치심 등 나날의 삶 속에 담긴 ‘신선한 날 것의 체험’을 온전히 이야기해줄 수 있는 철학이 과연 얼마나 되던가?”
현상학, 근대적 사고를 비판한 실천적 철학
20세기를 거쳐 최근에 이르면서 현상학은 철학의 가장 중요한 조류로 떠올랐다. 철학뿐 아니라 교육학, 심리학, 사회학, 인류학, 정치학 등 많은 분야에서 때로는 방법론으로, 때로는 이론적 틀로 현상학을 수용하고 응용하며 활발한 논의를 펼치고 있다. 특히 실험이나 통계적 분석, 표준화된 관찰을 토대로 하는 자연과학적 방법론인 양적 연구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등장한, 체험의 의미를 해석하는 데 중점을 두는 질적 연구에서 현상학은 가장 중요한 방법론이자 전제로 여겨진다.
이처럼 다양한 분야가 현상학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것이 근대 과학을 극복할 패러다임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현상학은 늘 무엇인가를 향하고 있는 의식의 지향성에서 출발한다. 대상이 우리 의식과 별개로 존재한다는 이전의 관념과 달리 현상학은 대상이 의식에 주어지는 방식대로 존재한다고 말한다. ‘의식에 주어지는 대상’인 ‘현상’에 대해 말함으로써 그 본질을 파악할 수 있다고 보는 현상학은, 그래서 우리 삶과 세계의 가장 구체적이고 날 것 그대로인 체험에 주목하자고 말하며 근대적 사고방식을 비판하는 실천적 철학으로 불린다. 여러 학문 분야뿐 아니라 문학, 미술, 영화 등 예술 분야에서도 현상학적 성찰로부터 영감을 얻으려 하는 이유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 중요성과 다양한 분야의 관심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것이 구체적인 삶의 체험을 다룸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현상학은 철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들, 일반 대중에게 그만큼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프랑스 철학의 위대한 시절』은 한국현상학회가 이런 대중의 갈증에 응답하기 위해 2년여에 걸쳐 비전공자를 위한 입문서로 기획하고 집필한 결과물이다. 책상 한 편에 두고 손쉽게 참조할 수 있는 친절한 안내서인 이 책은 독자들이 현상학을 통해 자기 삶의 체험을 사유하고 각자의 분야에 현상학을 도입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머리말 현상학, 대중 속으로 걸어 들어가다 | 홍성하
기획의 말 나날 속에서 꽃피울 철학적 성찰을 위해 | 한국현상학회 프랑스 철학 출판팀
총론 현상학의 태동에서 프랑스 현상학으로 | 최재식
01. 가브리엘 마르셀: 존재의 신비, 현상학 | 송석랑
02. 장폴 사르트르: 현상학적 실존주의 | 지영래
03. 에마뉘엘 레비나스: 타자의 철학 | 서동욱
04. 모리스 메를로퐁티: 상호세계의 현상학 | 김화자
05. 앙리 말디네: 리듬의 현상학 | 신인섭
06. 폴 리쾨르: 현상학에서 의미의 해석학으로 | 이양수
07. 미셸 앙리: 삶의 현상학 | 이은정
08. 자크 데리다: 현상학에서 해체론으로 | 김상록
09. 장뤽 낭시: 공동체의 철학 | 손영창
10. 장뤽 마리옹: 주어짐의 현상학 | 김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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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으로 읽는 프랑스 현대철학
현상학은 20세기 현대철학을 이끌어온 사상이다. 그 태동이 현상학 ‘운동’이라 불렸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 근대적 세계관의 맹점과 심리학주의의 허무로부터 철학을 구해내려는 분명한 목적을 가졌던 사상적 움직임이 바로 현상학이었다. 스스로 존재하는 모습대로 나타나는 대상의 참다운 존재 양식인 ‘현상’을 파악하려 한 이 움직임으로부터 우리가 지금 ‘현대철학’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걸출한 이름들이 등장했다. 의식과 몸 등의 개념을 새롭게 사유한 사르트르와 메를로퐁티, 현상학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며 타자에 관해 사유하는 길을 연 레비나스, 현상학의 자장 안에서 공동체에 관한 아름다운 사유를 전개하며 가장 최신의 프랑스 현대철학을 견인해온 낭시를 비롯해 서구 사상을 비판하는 데 천착한 데리다의 해체주의나 라캉의 정신분석학에서도 현상학의 분명한 영향을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현상학의 논의를 살펴보는 일은 바로 현대철학의 최전선을 만나는 일에 다름 아니다. 『프랑스 철학의 위대한 시절』은 현상학의 흐름을 중심으로 전개된 프랑스 현대철학의 흐름을 깊고 넓게 다룬다. 책을 쓴 열한 명의 현상학 전문가들은 후설 현상학이 탄생한 1900년부터 한 세기에 걸쳐 프랑스 현상학자 열 명의 사상을 살펴본다. 프랑스 현상학의 단초를 제공한 후설과 하이데거에서 시작해 프랑스 현상학의 대표주자들을 지나 그들을 계승한 최신 흐름까지 다루며, 이 책은 독자들에게 프랑스 현대철학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게 하는 유용한 지도가 되어줄 것이다. 각 장마다 해당 철학자의 사상적 배경을 이해할 수 있도록 그 생애를 간략하게 개괄하고, 중요한 저서와 함께 읽으면 좋을 해설서를 소개한 참고 도서와 각 철학자 사상의 핵심어 정리를 더해 독자들이 더 깊은 독서로 나아가는 충실한 가이드가 되려 했다.
이 책에서 다루는 철학자들과 그 사상
총론은 후설과 하이데거에서 시작한다. 독일의 이 두 학자가 어떤 배경에서 현상학을 탄생시키고 또 발전시켰는지, 후설이 주창한 “사태 그 자체로!”라는 현상학의 근본이념이 어떻게 프랑스에 도착해 ‘프랑스 철학의 위대한 시절’을 이룩하는 계기를 제공했는지, 베르그손 철학과 구조주의 등 프랑스 철학계가 현상학을 받아들이는 데 마련돼 있던 토양은 무엇이었고 프랑스 철학은 후설 현상학을 어떻게 비판적으로 계승했는지 세세하게 살핀다. 독자들은 총론을 통해 앞으로 만나게 될 프랑스 철학자들을 어떤 맥락 안에 위치지어야 하는지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가브리엘 마르셀은 ‘존재의 신비’에 대한 초월적 경험을 사유한 철학자다. 마르셀의 형이상학이 개인 실존의 구체성에 천착한다는 점에서 현상학적 태도를 취하는 동시에 초현상학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살펴보며, 우리는 그가 회복하려 하는 잃어버린 존재의 신비가 어떻게 우리에게 희망과 구원의 철학이 되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다.
이를테면 마르셀은 데카르트가 정신과 물질을 분리한 것에 대항해 “느끼는 것의 비도구성, 즉 느끼는 것의 실존 자체가 ‘솟아나지 않은 참여의 실재’를 긍정하는 사유”(『존재와 소유』)를 통해 정신과 물질을 잇는 “살”을 복원한다. 이는 메를로퐁티의 철학이 일정 부분 선취된 자리에서 존재의 신비를 경험할 수 있는 현상학적 초월의 일원론적 신체주체를 제시함으로써 실존의 구체성에 입각한 이차적 반성의 형이상학을 주장한 두드러진 사례다.(47쪽)
장폴 사르트르는 실존철학의 대명사이자 20세기를 대표하는 지식인, 소설가, 극작가, 비평가로 잘 알려져 있다. 사르트르 역시 이 책에서 현상학자로서 조명된다. 현상학적 방법론에서 출발해 실존이 본질에 선행한다고 보고 세계에 대한 전적인 ‘기투’를 강조한 전기 사상부터, 마르크스주의적 변증법에 영향을 받아 자유의 개념을 재정의하고 개인적 특수성을 역사의 보편적 일반성과 융합하려 한 후기 사상까지 사르트르 사상의 흐름을 충실히 따라가며 살펴본다.
언제나 결여의 상태로 있어야 하는 대자로서의 인간이 충만한 즉자로서의 사물과 같은 상태로 만족하고 있다면 죽은 시체나 다름이 없다. 이와 같이 대자로서의 인간임을 망각하는 행위를 사르트르는 ‘자기기만’이라고 부른다. 부단히 자기 자신으로부터 빠져나와 세계에 대해 전적인 ‘기투’로 존재해야 하는대자임을 망각하고 자기 자신을 스스로 충족된 상태로 여기는 인간, 깨어 있는 의식으로서 부단히 스스로를 비울 줄 모르는 인간, 그래서 뻔뻔스럽게 기득권에 안주하려는 자들을 사르트르는 자기기만에 빠진 인간으로 규정하고 철저히 배척한다. 그의 문학 작품이나 시사적인 글 속에서 ‘더러운 놈’, ‘근엄한 인간’, ‘우두머리’, ‘부르주아’ 등으로 등장하는 이러한 불성실하고 비겁한 무리는 기성세대 혹은 기득권층의 경직된 가치와 윤리를 대변하며 비판의 대상이 된다.(73쪽)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서양철학의 지배적 사유를 강하게 비판한 철학자다. 아우슈비츠에서 가족을 모두 잃은 경험이 그의 사상에도 큰 영향을 미쳤고, 레비나스의 사상은 ‘타자의 고유성’에 관해 사유할 수 있는 길을 우리에게 열어주었다. 타자를 동일자로 흡수해버리는 서양철학 일반을 비판하며, 레비나스는 같은 맥락에서 현상학 역시 비판적으로 본다. 이런 태도는 역설적으로 ‘현상 자체’가 스스로 말하는 길을 열어주며 다시 “사태 그 자체로!”라는 현상학의 근본이념을 되새기는 시도가 된다. 독자들은 레비나스를 다룬 3장에서 결코 동일자로 환원되지 않는 타자, 그리고 그 타자에 대한 윤리적 책임성에 끊임없이 몰두하여 “타인의 얼굴”을 만나는 그의 사상을 폭넓게 살펴보게 된다.
레비나스는 나와 절대적으로 다른 이타성을 지닌 타인과의 만남을 ‘타인의 얼굴’과의 마주침으로 해명하기도 한다. 절대적으로 다른 자, 곧 타자는 모든 것이 박탈된 궁핍한 ‘얼굴’, 고통받는 얼굴의 모습으로 나에게 현현한다. 나는 다른 사물을 인식하듯 타인을 인식할 수 있다. 또 급료를 제공하면서 타인을 수단으로 이용할 수도 있다. 이런 방식들을 통해서, 나의 세계를 구성하기 위해 타인을 소유할 수 있다. 그러나 고통받는 얼굴은 내가 어떤 식으로도 소유할 수 없는 자, 어떤 방식으로도 나로 환원되지 않는 자이다. 그 얼굴은 나의 모든 능력에 반대하여 나에게 ‘저항’한다. 얼굴의 저항이란, 대상 세계를 소유하고 지배하려는 나의 힘을 무력화하고 나의 윤리적 행동을 촉구하는 ‘윤리적 저항’이다.(102쪽)
모리스 메를로퐁티는 ‘몸’에 주목한 대표적인 학자로, 메를로퐁티의 사상은 이후 정신분석학과 미학 등 다양한 학문에 큰 영향을 끼쳤다. 4장에서는 생활세계를 중시한 후기 후설 현상학과 소쉬르 언어학의 영향을 받아 메를로퐁티가 발전시킨 고유한 ‘몸철학’에 관해 알아본다. 몸의 지각 체험과 감각, ‘살’의 애매성 등을 강조하며 근대의 합리적 가치의 허구를 비판한 메를로퐁티 사상의 전개와 영향을 확인할 수 있다.
메를로퐁티에게 코기토는 세계를 향해 초월하는 열린 운동과 몸의 감각적이고 우연한 지각 체험에 근거하기 때문에 결코 확실하거나 투명한 의식이 될 수 없고 불가피하게 ‘애매성’을 지닐 수밖에 없다. 메를로퐁티에게서 코기토는 ‘사유하는 정신’이 아니라 불확실성과 불투명성을 내포한 몸의 “암묵적 코기토”인 것이다. 사유란 몸의 감각적 움직임에서 체화된 지각하는 의식일 뿐이고, 반성하는 의식은 몸의 감각적 반성에 근거한 것임을 알 수 있다.(117쪽)
앙리 말디네는 5장에서 만나게 되는 ‘리듬의 현상학자’다. 말디네는 후설, 하이데거, 메를로퐁티 같은 현상학자들에게서 영향을 받은 동시에, 세잔, 칸딘스키, 클레 등의 예술가들, 기욤과 벵베니스트의 언어학, 그리고 빈스방거의 현존재분석 등 다양한 사유 지평에서 자신의 사상을 발전시키며 예술계와 정신의학계에서도 주목받는 철학자가 된다.
말디네는 여기서 현존재와 세계 사이의 일반적 실존 상태보다 더 나아가게 된다. 말하자면 그에게는 실존의 보편적 세계 개방만이 아니라 각자에게 의미로 다가오는 사건의 수용이 관건이 된다. 즉 말디네의 현존재분석은 독특한 자기성을 형성하는 ‘예기치 못한’ 사건에 대한 ‘놀람’으로 해명되는데, 그는 이 놀람을 ‘만남’으로 이해한다. 여기에 횡단-수용성이라는 개념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동물로부터 인간적 실존을 구분하는 ‘구체적 개방’의 역량이다. 즉 예기치 못한 바를 감내하는 능력이자 의외의 것을 수용할 수 있도록 자신을 만들어가는 능력이다.(145쪽)
폴 리쾨르는 인간 실존의 의미에 몰두하며 현상학적 방법론을 차용했지만 더 나아가 해석학으로 이어지는 길을 연 철학자다. 리쾨르는 신체를 통한 주체의 체험과 인간 의식의 대상을 탐구하는 현상학을 통해 실존의 의미에 접근하지만, 의미를 자기 것으로 전유하고 새로운 삶을 설계하는 과정에서 해석학의 계기가 필요하다고 본다. 정신적인 것은 무의미한 삶을 의미 있는 삶으로 바꾼다. 모든 것이 무의미해질 때 인간에게는 새로운 삶에 대한 구상, 삶의 새로운 의미가 필요하다. 물론 삶의 새로운 의미가 환상이나 망상일 수 없다. 이 조건을 충족하려면 자기 자신의 목표가 이전 삶의 의미와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야 한다. 중요한 점은 자신의 삶에 대한 회고나 반성만으로 새로운 의미가 생기지 않는다는 점이다. 새로운 의미가 나타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삶을 전체적인 관점에서 회고할 때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전체적 관점을 취할 수 있는가? 이 전체적 관점은 이념적인 특성을 띤다. 주체의 새로운 의미와 연관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삶의 진정한 의미는 삶의 전체적 목표, 자기 자신의 고유한 삶에 문제를 제기할 때, 즉 실존을 문제 삼을 때 나타난다.(166~167쪽)
미셸 앙리는 항독 지하운동에 참여한 경험으로부터 근원적인 삶의 문제에 평생을 몰두한 철학자다. 앙리는 후설, 하이데거, 사르트르, 메를로퐁티로 이어지는 ‘역사적 현상학’의 전제인 현상학적 일원론의 정체를 밝히고 비판하며 초월론적 삶 그 자체를 드러내려 했다. 7장에서는 카프카와 니체, 쇼펜하우어 등의 사상가의 영향 아래, 무엇보다 후설이 실패한 곳에서 출발해 ‘세계의 현상학’이 아닌 ‘삶의 현상학’을 정초하려 한 앙리의 사상을 살펴본다.
1943년 4월 프랑스 릴 대학에서 「스피노자의 행복」이라는 석사 학위 논문 발표를 마친 미셸 앙리는 곧바로 항독 지하운동에 가담한다. 이때 경험은 그가 삶을 생각하는 방식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바로 내밀한 자기 감정으로서 삶은 세계 어디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며, 세계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생각은 평생 그를 따라다니게 되고, 우리는 그의 책 곳곳에서 이 ‘보이지 않는 삶’, 우리 모두를 결정하는 근원적인 삶과 마주한다. “아주 나쁜 때에, 세상이 끔찍해질 때, 나는 내 안에서 보호해야 하고 또 나를 보호해주는 비밀처럼 그 삶을 겪었다. 세계의 나타남보다 더 깊고 더 오래된 나타남이 우리 인간 조건을 결정한다.”(179쪽)
자크 데리다는 현대철학을 말할 때 피해갈 수 없는 철학자이자 해체주의를 대표하는 사상가다. 데리다의 철학 역시 현상학과의 만남에서 탄생했다. 여기서는 데리다의 사상이 후설 독해에서 출발해 하이데거의 ‘존재론 역사의 해체’라는 기획을 계승하며 현상학의 자장 안에서 전개된 맥락에 주목한다. 이 과정을 따라가며 유럽 문명이 보편화된 시대에 제기된 문제들과 이론적, 실천적으로 끈질기게 싸워온 데리다의 해체론이 제시하는 성찰을 마주할 수 있다.
물론 하이데거의 존재 물음은 현전의 형이상학보다 더 오래된 기원을 설정하여 형이상학적 역사성 개념보다 더 확장된 역사성을 사유한다. 그러나 데리다가 보기에 그리스적 사유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하이데거의 사유 역시 진정한 보편성에 이르지 못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유대적 기원에서 출발하여 후설과 하이데거의 그리스적 사유를 넘어서고자 했던 레비나스가 데리다에게 미친 영향력을 감지할 수 있다. 그렇지만 데리다의 차이가 레비나스적 의미의 타자성으로 귀착되는 것은 아니다. 데리다가 추구하는 것은 유럽에서 탄생한 철학이 자신의 태생적 한계로부터 계속 자기해방을 이루어가고, 철학이 보편성을 향해 끊임없이 자기를 극복해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차이는 바로 이런 운동의 원리이다.(223쪽)
장뤽 낭시는 공동체에 천착해 현대 민주주의의 문제점에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며 현재 가장 중요한 프랑스 철학자 중 하나로 여겨지는 사상가다. 타자와 함께함, 실존의 간극을 넘어설 수 없는 가운데 공존하는 우리의 존재와 사회에 관해 낭시가 들려주는 감동적인 사유를 그의 공동존재론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낭시가 말하는 유일자적 단수는 다수성과 분리될 수 없다. 유일자는 타자들과-함께하는-일자들이다. 그래서 유일자는 언제나 타자에게 열려 있는 존재이며 이런 열림의 방식은 외존적이다. 인간은 본래적인 의미에서 타인에게 열려 있는 방식으로 다수로 존재한다. 유한성 개념에서 보았듯이 이때 다수로서의 공동체는 유일자를 자신의 내부에 하나로 통일하지 못한다. 그러기에 나와 너의 관계를 지시하는 ‘우리’는 하나의 전체를 의미하거나 단일한 기반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이 점에서 ‘우리’는 나와 너의 종합이 아니라 넘어설 수 없는 실존들 사이의 간극이며 동시에 이 간극 속에서 공존함을 의미한다.(242쪽)
장뤽 마리옹은 ‘주어짐의 현상학’을 정초한 철학자로 소개된다. 마리옹은 후설과 하이데거를 계승하되, 그들의 철학이 현상을 좁은 대상성의 영역이나 존재가 드러나는 사건의 장에 가둠으로써 현상의 고유한 가능성을 제한했다고 비판한다. 이런 비판에 기반해 마리옹은 ‘순수한 주어짐’으로서 현상을 ‘선물’이라는 개념을 통해 되살려내려 한다.
칸트는 『순수이성 비판』에서 현상의 나타남과 개념 결합의 문제에 관해, “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이다.”라는 유명한 언명을 제시한 바 있다. 그런데 마리옹은 이 언명을 조금 비틀어 이해한다. 개념 없는 직관이 맹목이라고 하더라도, 주어짐의 내용이 직관에 담기지 않으면 개념적 사고 자체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직관을 초과하는 것의 주어짐은 우리를 혼란에 빠트린다. 한 예로 우리는 위대한 예술 작품이나 어마어마한 자연 광경을 보면서 그것을 형언할 말을 잃어버리는 수준의 경험을 할 수 있다. 이 경우 우리는 자연 광경에 대한 이름, 작품에 대한 이름만으로는 거기서 일어나는 극한의 정서를 표현할 수 없다. 적어도 그 순간에는 그러한 현상들에 대한 개념 규정도, 파악도 무용한 것이 되고 만다. 이러한 초과의 경험을 일으키게 만드는 극한의 현상이 바로 포화된 현상이다.(25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