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위가 사라진 자리를 차지한 것은 우울증과 번아웃이다
변화의 본질을 관통하는 권위에 대한 탁월한 분석
이 책은 최근 우리 곁에서 벌어지고 있는 다종다양한 심리사회적 징후를 꿰뚫는 개념으로 ‘권위’를 제시한다. 수많은 문제의 배경에는 공통적으로 ‘권위의 부재’라는 원인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권위가 사라져가는 것이 문제라니, 일순 갸웃할지 모른다. 권위적 체제가 흔히 독재의 동의어로 받아들여지듯, 권위는 여전히 20세기의 전쟁과 광기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하지만 권위란 이 책의 서문에서부터 언급되는 것처럼 ‘권위주의’와 다르고 ‘권력(power)’과도 다르다.
저자는 권위의 가장 기본적이고도 주요한 기능에 대해, “권위란 인간관계를 규제하는 기능을” 한다는 한나 아렌트의 말을 빌려 설명한다. 사람은 부모, 자녀, 또래, 동료, 이성 등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내’가 되기에, 권위는 개인의 정체성 형성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더불어 살아가는 기본 문제들’, 공동체를 이루고 더 나은 사회를 구성하기 위한 근간임은 물론이다. 권위주의적 질서나 권력에만 동조하는 ‘어른’은 말할 것도 없지만, 부모, 교사, 상사, 정치인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꼰대’로 비치는 게 두려워 권위자가 되기를 아예 회피하는 것 역시 문제다. 그 영향은 개인적, 심리적 차원뿐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 차원에도 미친다. 대표적인 권위의 모델인 양육과 교육을 예로 들어보자. 요즘 부모들이 흔히 범하는 오류 중 하나가 아이에게 “가장 친한 친구”로 다가가려 하는 것이다. 양육자라면 “양육 과정에 확실한 권위자의 위치”에서 충분한 훈육을 단호하게 해내야 하며, 그래야 아이가 안정감과 자기 통제를 배울 수 있다(218~219쪽).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일명 ‘칭찬 육아’는 역설적으로 아이의 자존감을 떨어트려 문제의 소지를 키우기 쉽다. 아이가 자라 교실에서 들어가서도 마찬가지다. 권위의 자리를 기피하는 교사는 수업 시간 내내 엎드려 자는 아이를 그대로 두는 등 교실에서 학생들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피하게 되고, 방임과 같은 상황에서 아이들의 반사회적 행동 등이 개선될 가능성도 줄어든다. 이 어른들의 공통점이라면 모두 ‘권위를 인정’받는 방법을 모른다는 점이다.
한편 권위의 실패와 부재는 과잉 규제를 야기한다. ‘자발적 복종’에 기초로 작동하는 권위는 자신의 뜻을 강압이나 폭력으로(만) 관철시키지 않는다. 따라서 “어떤 집단이 같은 권위를 따른다는 것은 깊은 신뢰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134쪽)는 의미다. 권위가 불안정해질수록 신뢰 관계가 약해지고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는 규칙과 통제, 강압적 조치가 늘어난다. 이런 일은 교육제도, 관료제에서 곧잘 벌어진다. 가령 교내 폭력을 더 엄정하게 처벌하기 위해 학교폭력자치위원회가 설치되고, 투명성을 취지로 한 학폭위 역시 잘 운영되지 않자 ‘학폭위 전문 보험•변호사’까지도 등장하고 있는 사례를 떠올려볼 수 있다. 또는 정부가 자녀의 감시를 통한 부모 행동의 변화를 유도하는 캠페인(38쪽)을 주도하기도 하고, 대중은 ‘좋아요’ 수를 높이기 위해 자발적으로 수많은 카메라와 스마트 기기로 촘촘히 엮인 감시체계에 참여한다. 이렇게 강해지는 사회적 통제의 압박은, 타인의 시선에 굴복하거나 소외됨에 따라 수치심과 우울감을 느끼기 쉽게 만들며 오늘날을 우울증의 시대로 만드는 데 크게 공헌하고 있다. 이와 함께, 직위의 권위는 사라지고 통제는 증가하면서 번아웃에 빠지는 경우가 늘어나는데, 특히 심리치료 분야 종사자들이 번아웃을 겪는 비율이 유독 높다(109~114쪽). 심리치료 목적이 내담자를 돕는 것에서 ‘사회 적응’(스트레스의 주범인 곳으로의 복귀)으로 바뀐 사실, 도움이 되지 않는 상담 규정들의 추가, 상담성과 평가시스템 등이 결합돼 내담자에 헌신하는 상담사일수록 결국 그 자신이 상담을 받아야 하는 상태에 빠지고 마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정신분석학의 대가가 제시하는 ‘새로운 권위’라는 해법
이 책은 물론 권위의 상실이 문제라고 말하며 사회변화에 불만을 느끼는 보수우파처럼 옛 권위로 돌아가자고 말하지 않는다. 저자가 이미 분명하게 시효가 다 됐다고 말하는 권위는 전통적인 하향식(피라미드) 형태의 남성 전유물인 ‘가부장적 권위’이다. 이 가부장적 권위는 “권력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권위에 대한 우리의 부정적인 이미지는 사실 근거가 있는 것이다. 가부장적 권위는 그동안 인류의 절반 이상을 배제하고 억압해왔을뿐더러, 현재의 사회변화를 더 이상 충분히 반영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우리가 권위 자체와 작별을 고하는 것은 아니다.”(80쪽) 우리가 권위 자체를 부정할수록, 민주주의에 대한 불신, 양극화 심화, 기후위기 등의 정치경제적 위기 앞에서 포퓰리즘이나 테크노크라시(기술관료제)처럼 피라미드형 순수 권력으로 이어지는 길을 택할 위험이 커지기 때문이다.
이 책은 이전과는 다른 원천에서 신뢰를 회복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작동하는 권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수평적인 집단에 근거한 ‘수평적 권위’이며, 집단 구성원 상호 간의 사회적 통제에 의해 작동하는 권위이다. 수평적 조직 구조를 재편해 혁신에 성공한 브라질 대기업 ‘셈코’, 이런 조직 구조 혁신을 공공기관에 적용해 성공을 거둔 벨기에 공공서비스 사회보장청, 또는 투표 참여자에게 충분한 정보와 토론 시간을 제공하는 ‘숙의적 여론조사’의 적용례 등 교육, 경제, 정치 영역을 포함해 사례를 풍부하게 다룬다. 또한 ‘아이들끼리 주최하는 파티에서 몇 시까지 놀아도 좋은가’라는 디테일한 사안에서부터 학부모 네트워크나 교사 네트워크가 양육•교육 이슈를 어떻게 ‘수평적 집단’으로서 결정하고 해결할 수 있는지 현실적인 모델을 보여주기도 한다.
우리는 신자유주의 체제가 개인에게 부과한 심리학•정신의학적 측면을 비롯한 너무 많은 짐을 해결하기 위해 각개전투를 치르고 있다.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도덕적 주장들, 책임, 자율, 연대 등의 주제를 고민하고 실천하는 일 역시 마찬가지였다. 권위 모델의 변화는 공유경제 또는 숙의 민주주의 등 시스템에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당연하게도 부모상(象), 교사상, 경영자상의 변화를 함께 견인한다. 이는 곧 내가 어떤 시민으로, 어른으로 관계 맺고 공동체에 속해 살아갈 것인가 하는 고민과 깊이 연결된다. 이 책은 현대를 살아가는 독자들이 개인으로서 맞닥뜨린 이런 문제를 ‘수평적 네트워크’로서 풀어보자고 제안하고 있는 책이다.
서문
1 정체성과 권위
2 권위의 원천: 왜냐고? 내가 하는 말이니까!
3 불가능한 세 가지 직업
4 귀환인가, 변화인가: 다스베이더 대 빅브라더
간주
5 여성의 시대
6 집단으로서의 부모
7 돈 내놓을래, 죽을래?
8 발데마르 씨, 혹은 숙의 민주주의
결론
감사의 말
옮긴이의 말
참고문헌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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