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영국 인문 기행

서경식 | 옮김 최재혁

출판사 반비 | 발행일 2019년 8월 17일 | ISBN 979-11-8919-889-3

패키지 반양장 · 296쪽 | 가격 17,000원

책소개

디아스포라 에세이스트 서경식이 다시 찾은, 아이러니의 나라 영국!

 

영국을 찾아갈 때마다 이 땅은 나에게 동경과 반감, 경의와 경멸이 한데 뒤섞인 복잡한 상념을 불러일으켰다. 윌리엄 셰익스피어, 오스카 와일드, 조지 오웰 등 나에게는 우상이라고도 할 법한 수많은 문학가들을 낳은 곳. (…) 어쨌든 나는 젊은 시절부터 영국의 문화와 예술에 매혹되어 왔다. 이와 동시에 이 나라가 대제국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발휘해왔던, 두려울 정도로 냉혹하고 교활했던 측면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 이렇게 모순으로 가득 찬 양면성이 이 나라 사람들의 문화에도 암울한 아이러니를 움트게 하여 그들의 작품은 복잡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당신은 영국이 좋은가?” 누군가 이렇게 묻는다고 해도 답하기는 어렵다. 질문 자체가 너무 단순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앞서 언급한 이 양면성이 “인간이란 무엇인가?”, “역사란 무엇인가?” 같은 인문학적 물음을 끊임없이 불러일으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영국이 좋다.”라고 대답할 수는 없지만, ‘영국적 문제’에 마음이 끌린다는 점만은 부정할 생각이 없다.

_ 저자의 말 중에서

 

루벤스, 프란스 할스, 벤자민 브리튼, 피터 피어스, 윌프레드 오언, 헨리 퍼셀, 잉카 쇼니바레, 잉그리드 폴라드, 터너, 존 컨스터블, 리처드 빌링엄, 버지니아 울프, 레너드 울프……
식민지배와 대서양 삼각무역, 청교도혁명과 종교전쟁, 제1~2차 세계대전……

1. 재일조선인 디아스포라가 만난 영국의 역사와 예술

『나의 이탈리아 인문 기행』에 이어 서경식이 《릿터》에 연재한 여행 에세이를 묶은 책이다. 서경식은 2015년 영국과 아일랜드 등지를 여행하며 루벤스부터 프란스 할스, 벤자민 브리튼, 헨리 퍼셀, 잉카 쇼니바레, 터너, 존 컨스터블, 버지니아 울프 등의 작품들을 감상하고, 노예제와 대서양 삼각무역, 식민지배와 가부장제, 청교도혁명과 종교전쟁, 제1~2차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역사를 디아스포라의 관점에서 재해석하여 들려준다.
서경식의 책의 애독자들을 이미 잘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그의 유럽 여행기는 일상을 벗어나 낯설고 자유로운 곳에서 견문을 넓히는 즐거움으로 가득 찬 여행의 기록이 아니다. 조국에서 옥살이를 하는 형들(서승, 서준식)의 옥바라지를 하는 30대의 재일조선인 청년에게 유럽의 다양한 미술관에서 만난 작품들은 지하실에 난 창문으로 겨우 들어오는 희박한 공기였다고 기록한 『나의 서양 미술 순례』부터 30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항상, 그의 여행은 그야말로 ‘순례’라는 말이 정확히 들어맞는다. 그것은 ‘자신’에 대해 묻고, ‘조선인’이라는 정체성과 연결된 식민지의 역사, 제국의 역사에 대해 묻고, 또 나아가 ‘인간’에 대해 묻는 깊고 어두운 탐색에 가깝다.
특히 거대한 제국의 그림자를 지닌 영국, 근대 과학과 정치와 경제의 역사를 이끌어온 영국, 전지구화로 인해 신음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뒤섞여 살아가는 영국을 여행하면서 이런 탐색은 더 빛을 발한다. 올드버러에서 크롬웰의 생가를 방문한 곳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떠올리고, 레이크디스트릭트에서 아프리카 여성 아티스트의 시선을 상상해보는 저자의 기록을 읽으며 독자들 역시 나름의 질문들을 만들어볼 수 있으리라. 특히 버지니아 울프의 자살을 레너드 울프의 유대인 정체성과 전쟁으로 치닫는 당대 유럽의 광기와 연결시켜 읽어내는 대목은 놀라울 정도로 참신하면서도 설득력 있다.
재일조선인이라는 정체성뿐만 아니라 1983년의 방문, 2001년의 방문, 2015년의 방문이라는 세 겹의 시간이 더더욱 입체적인 여행의 기록이 되었다. 젊은 시절의 ‘미술중독자’가 바라본 터너의 작품과 60대의 모즈쿠 전쟁 패전 용사가 바라보는 터너의 작품은 어떻게 다른지, 브레히트의 시는 30년의 거리를 두고 어떻게 다시 읽히는지, 단순한 구로코 역할로 생각되었던 피어스가 어떤 과정을 거쳐 브리튼의 음악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아티스트로 이해되는지 음미해볼 수 있는 것은 서경식 책의 애독자들이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다.

설문조사를 둘러싼 상황을 보며 나는 자연스럽게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떠올렸다. “히데요시는 영웅일까, 악한일까?”라고 묻는다면 현재 일본 국민들은 어떤 대답을 할까? 히데요시가 죽었던 해는 1598년. 그로부터 1년 후 일본에서 멀리 떨어진 잉글랜드 땅에서 크롬웰이 태어났다. 이 두 사람의 생애는 여러 면에서 서로 닮았다. 특히 히데요시가 주도한 두 번의 조선 침략인 임진왜란(1592)과 정유재란(1597), 그리고 크롬웰 군대의 아일랜드 침공에는 유사한 점이 있다고 생각된다. 반세기 남짓 시차를 두고 극동과, 영국·아일랜드라는 극서의 땅에서 이렇게 서로 비슷한 양상의 커다란 사건이 일어났던 것이다.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한 동기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1492년 콜럼버스의 신대륙 도달 이후의 세계적 대변동과 ‘세계 시스템’의 형성 과정에서 생겨난 거대한 파도가 동아시아에까지 미쳤던 현상으로 보는 것도 가능하다.(35, 37)

많은 일본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히데요시를 영웅이라고 생각하면서 자랐던 나는,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그런 내 자신에게 위화감과 불편함을 느끼게 되었다. 히데요시가 나의 영웅이 아니라는 점을 깨달으며 묵살되어온 소수자나 패배자의 존재에 눈을 떴던 셈이다. 나 자신이 그런 패자들 쪽에 속해 있다는 사실 역시. 그러한 ‘불편함’이야말로 내 인생의 귀중한 자산이다. 만약 그 자각이 없었더라면 내 정신세계는 언제까지나 일면적이고 천박했으리라. 아일랜드 사람이라면 크롬웰을 어떻게 생각할지를 상상해보는 일도 불가능했을 것이다.(39)

반전평화주의자 벤저민 브리튼이 천황제 군국주의의 중요한 의전이었던 황기 2600년 기념제를 위해 작곡했다는 에피소드는 꽤 복잡하고 흥미롭다. 당시 브리튼은 아직 젊었고(28세), 미국에서의 타향살이로 경제적으로도 곤궁했다는 사실이 하나의 설명이 될 수 있다. 젊고 가난하며 야심이 넘쳤던 작곡가에게는 이 의뢰가 큰 기회로 여겨졌으리라는 점은 이상하지 않다. 또 아무리 반전주의자라고 하더라도 유럽에서 자랐던 젊은이에게 머나먼 극동에 위치한 일본은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존재였을 것이다. 그래서 절박한 위기감으로 다가오는 대상은 아니었으리라는 해석도 가능하다.(83)

나는 20년쯤 전에 코번트리를 방문한 적이 있다. 워릭 대학교에서 유학 중이던 친절한 일본인 청년이 폭격의 흔적이 남아 있는 대성당 터와 거기에 인접한 새로운 성당을 안내해주었다. 예전에 나는 연합군에 의한 전략 폭격으로 철저하게 파괴된 드레스덴에 갔다. 그때 피해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성모 교회를 찾은 적이 있었기에 적대국 관계에 있던 영국과 독일 두 나라에서 공통적으로 전략 폭격의 피해를 입은 도시에 가보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 무렵에는 브리튼의 「전쟁 레퀴엠」에 특별히 깊은 관심이 없었고 모처럼 방문했던 코번트리 여행도 지금 생각하면 겉핥기식으로 끝났다. 20년이 지나 이미 늦어버렸지만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101, 103)

오늘 하루 보고 들었던 것을 천천히 반추해본다. 머릿속에서 브리튼이 토머스 하디의 시에 곡을 붙인 가곡 「겨울의 언어」의 마지막 곡 「생명의 앞뒤」 마지막 행이 조용히 흘렀다. “How long,how long?”이라고. 머릿속으로 테너 가수의 섬세한 목소리가 반복해서 맴돈다.
정말 앞으로 얼마나 지나야 할까? 제1차세계대전의 참화를 경험한 후 인류는 게르니카, 난징, 코번트리, 드레스덴, 아우슈비츠, 히로시마, 나가사키…… 그 밖에도 과거의 일들을 훨씬 능가하는 잔학과 무자비를 스스로 연출했다. 그 후로도 계속 이어진 한국, 베트남, 구 유고슬라비아, 팔레스타인, 이라크, 우크라이나, 시리아…… 아, 여전히 세계는 피투성이다. 대체 언제까지? 제1차 세계대전 때 죽은 젊은 시인의 말에 인류가 귀를 기울이기까지는 앞으로 얼마나 더 시간이 흘러야 할까? 브리튼의 음악에는 이 어리석은 행진을 멈추게 할 힘은 없다. 하지만 그의 음악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렇게 믿고 싶다. 그렇지만 앞으로 얼마나 더 지나야 할까?(109)

“피어스는 브리튼에게 참 커다란 존재였네.” F가 입을 열었다. “응, 그런 생각은 별로 하지 못했어.”라고 나는 대답한다. 나는 아무래도 피어스가 브리튼의 그림자 뒤에 조용히 숨어 있는 구로코(가부키 무대에서 검은 옷을 입고 배우 뒤에서 연기를 돕는 사람)같은 존재라는 잘못된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알고 보니 그는 뛰어난 가수였을 뿐만 아니라 당당한 지식인이자 때로는 브리튼을 이끌어주던 사람이었다. 브리튼은 피어스라는 존재가 있었기에 그가 노래를 부를 것을 상정하고 수많은 명곡을 썼고, 피어스도 거기에 견실히 응했다. 고흐와 동생 테오가 그랬듯 브리튼과 피어스도 한 몸인 예술가였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피어스에 대해서 더 알아야만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케임브리지로 돌아갈 시간이 가까워졌다. 왔을 때와 같은 루트로 거꾸로 거슬러 돌아가게 된다. 버스에 올라 마을을 떠날 때 브리튼과 피어스가 나란히 잠든 작은 교회 옆을 다시 지나갔다.(111)

그는 고개를 저으며 희미한 미소를 띠다가 “그래? 기왕 연극을 한다면 브레히트를 읽지 않으면 안 돼.”라고 말했다. 브레히트? 의아해하는 내게 L형은 두꺼운 안경 너머로 눈을 가늘게 뜨고서 소격효과 같은 난해한 개념과 용어를 설명해주고는 『오늘날의 세계는 연극으로 재현 가능한가?』라는 책을 읽으라고 권했다. 일본의 연출가이자 연극배우 센다 고레야가 브레히트의 연극론을 묶어서 번역했던, 1962년 당시 막 출간된 책이었다. 어떤 일이든 내 능력 밖의 것까지 해내려고 애썼던 나는 바로 그 두꺼운 책과 씨름했지만, 거의 알아먹을 수가 없었다. 다만 내가 이해했던 것은 L형이 나를 아이 취급하며 깔보지 않고 오히려 대등한 어른처럼 대해주었다는 점, 그리고 ‘오늘날의 세계’를 이해하고 또 ‘재현’하기 위해서는 이런 난해한 책과 씨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덧붙여 ‘브레히트’라는 인물은 어쨌건 그러한 분야에서 세상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있다는 사실이었다.(137)

오페라 「마하고니 시의 흥망성쇠」는 큰 갈채를 받으며 막을 내렸다. 흥분이 채 가라앉지 않은 관객들과 뒤섞인 채 F와 나는 코번트가든으로 휩쓸려 나왔다. 밤은 이슥했지만 거리는 여전히 밝았고, 서로 친밀해 보이는 사람들은 세련된 카페나 펍으로 몰려갔다. 경쾌하고 절묘한 기지, 신랄한 풍자, 압도적인 무대미술, 일류 예술가들이 펼쳐낸 노래와 춤……. 나 역시 물론 만족스러웠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마음이 복잡했다. 이곳에서 나는 ‘브레히트’라는 키워드를 통해 열두 살 이후 반세기에 걸쳐 지나온 나의 인생을 되돌아볼 수 있었다. 제1차세계대전이 끝난 후 펼쳐진 나치즘의 흥망, 제2차세계대전에서 시작하여 사회주의권의 붕괴를 거친 지금까지의 인류사를 돌이켜보게 되었다. 과연 나는 제대로 살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인류 사회는 나아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이 괴물을 낳은 자궁”은 이제 사라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관객들 대부분은 오페라를 무척 즐겁게 본 듯했지만 이 작품을 즐긴다는 것은 과연 어떤 행위일까. 「마하고니 시의 흥망성쇠」는 최고 수준의 ‘오락’이 될 수 있을까. 그리고 “오늘날의 세계는 연극으로 재현 가능한가?” 어린 시절의 나에게 던져졌던 무거운 질문이 반세기가 지나 먼 곳 런던에서 머릿속에 되살아나 마음을 들쑤셨다.(149, 151)

생각해보면 그 무렵은 제2차세계대전이 끝난 지 거의 20년밖에 지나지 않았던 시절이다. 20년이라니, 지금 생각하면 눈 깜짝할 사이다. 고등학교 1학년이었던 나는 저 먼 나라의 시인이 부르는 소리를 다름 아닌 ‘후대 사람’의 위치에 서서 읽었던 것이다. ‘암울한 시대’가 아직 지속되고 있다고는 해도 어디까지나 내 뒤편에 놓여 있는 듯 생각했다. 그 시절로부터 거의 반세기가 지나버렸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 ‘암울한 시대’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나의 앞쪽으로, 끝도 없이. 지금 나는 런던에서 브레히트의 목소리에 덧붙여 ‘후대 사람’들에게 호소하는 심경으로, 이 시를 떠올리고 있는 셈이다.(2014년 5월에 일본 오사카에서 강연을 할 때, 청중 가운데 젊은 재일조선인과 일본인을 염두에 두고 이 시를 인용하며 낭독한 적이 있다.)(141)

일반적인 백인 남성은 느낄 수 없는 감각일 것이다. ‘전형적인 영국의’ 풍경, 그 속에 몸을 두는 행위 자체가 ‘노예 출신의 여성’에게는 강한 불안과 공포를 불러일으킨다는 뜻이다. 그들, 백인은 폴라드의 선조를 사냥감으로 취급하며 몰이를 했고 반항하면 채 찍질을, 때때로 강간도 서슴지 않았으며, 결국 죽으면 대서양에 내던져버리던 자들이었기에. 백인들이 사랑해 마지않는 목가적인 풍경조차 그런 불안과 공포를 불러와 그녀의 마음속을 휘저어 놓았던 셈이다. 백인 주류 계층은 폴라드의 작품을 통해 그런 감각을 아주 일부만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포스트콜로니얼’ 시대의 미술은 우리에게 이러한 시점, 다름 아닌 ‘타자의 시점’을 요구한다. 무척이나 힘겹지만 우리의 시야를 확실하게 넓혀주는 요구이기도 하다. 재일조선인 남성인 나는 레이크 디스트릭트를 찾아갔던 과거를 그리워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괜찮은 걸까? 이렇게 말하는 나는 과연 누구인 걸까? 잉그리드 폴라드의 작품을 알게 된 후, 스스로에 대한 그런 의문들이 복잡하게 뒤얽히고 있다.(211)

멀리 유럽까지 왔으니 그래도 이런 명작 감상은 포기해서는 안 될 사명과도 같다고 스스로를 다그치며, 고된 노역에 시달리는 노예처럼 미술관에서 미술관을 전전했던 것이다. 터너의 소품에 마음을 빼앗겼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파리를 떠나 드디어 영국으로 건너간다는 사실에 어떤 해방감마저 느꼈다. ‘영국에 가면 반드시 봐야 하는 작품이 프랑스처럼 많지는 않겠지. 조금 쉬면서 자연 속에서 조용히 며칠을 보내야겠다.’라고 생각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35년 전의 나는 그 정도로 무지했다.(215)

영국을 대표하는 위대한 풍경화가 터너와 컨스터블은 거의 동시대를 살았다. 그렇지만 두 사람의 작품이 주는 인상은 전혀 다르다. 컨스터블을 정靜, 평화, 조화라고 한다면, 터너는 동動, 투쟁, 혼돈이다. 전자를 삶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죽음이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대조적일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나에게 컨스터블이 ‘마음에 드는’ 화가라면, 터너는 ‘마음을 술렁이게 하는’ 화가다. 그래서 더욱 터너에게 끌린다.
파리에서 열렸던 터너 회고전을 봤을 때 눈 딱 감고 두툼한 도록을 샀는데, 지금 꺼내보니 같이 받았던 간략한 해설 책자가 사이에 끼워져 있었다. 35년만이다. 순간 시공을 뛰어넘어 그랑 팔레에서 돌아와 싸구려 호텔방에서 이 소책자를 펼쳤던 서른두살의 나 자신이 되살아났다. 다시 훑어보니 터너를 베토벤과 비교하여 서술한 글이 있다. 당시는 딱히 마음에 두지 않고 넘어갔던 부분이다.(233)

제2차세계대전이 시작되자 독일군의 공습이 런던에도 자행되기 시작했다. 버지니아와 레너드의 자택이 있던 서섹스 주 로드멜은 영국의 지식인 사이에서 독일군의 첫 상륙지라고 예상했던 남쪽 해안의 항구 마을 뉴헤이븐 바로 근처였다. “만약 붙잡힌다면 레너드는 유대인이며 눈에 띄는 반나치 운동을 했기 때문에 부부는 함께 게슈타포에게 인권을 유린당하리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두 사람 분의 치사량 모르핀을 상비하고, 독일군이 쳐들어온다면 자살할 수 있도록 창고에 가솔린을 준비해두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동요 없이 차분했다.”(나이젤 니콜슨, 앞의 책.) 실제로 레너드와 버지니아는 나치가 영국 점령 후에 구속할 대상자 리스트에 올라 있었다고 한다. 표면상 어떠했건, 이러한 긴장감과 버지니아의 자살이 관계없었다고 생각되지 않는다.(287)

자살이라는 사건 옆으로 여성차별과 인종차별, 게다가 파시즘의 위협이라는 보조선을 그어보면, 근대라는 시대에 ‘개인의 존엄’(그리고 이에 기초한 ‘자유와 우애’)을 추구하던 사람들이 야비한 폭력에 의해 압살을 당해온 역사가 한눈에 떠오른다.
지금 우리는 어떤 시대를 살아가고 있을까. 미국과 유럽에서, 그리고 일본에서 목소리 높여 배외주의를 외치는 세력이 늘어가고 있다. 지금과 1930년대는 서로 닮았다. ‘이 시대의 버지니아’들은 여기저기의 절망 속에서 생명을 끊고 있을 것이다. 인간은 과거로부터는 배울 수 없는 존재일까. 쉽사리 대답할 수 없는 이 어려운 질문을 우즈 강변에서 생각하고 싶었지만 그 바람은 이루지 못했다.(289)

편집자 리뷰

2. 역시 영국적이다!

‘당신을 영국을 좋아하는가’라는 물음을 역사란 무엇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바꾸어내는 저자는, 이 기행 내내 ‘영국적’이라는 것에 대해 여러 방향에서 사례를 보여준다. 그것은 때로 존 컨스터블의 그림을 떠올리는 고요한 햄스테드 히스에서의 산책으로 느껴지기도 하고, 획기적으로 개선된 매연의 냄새로 감각되기도 한다. 또 그것은 겸허하고 유머를 갖춘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의 지식인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고(저자는 여기서 제국이 쌓아올린 지의 퇴적을 읽어낸다.), 대서양 삼각무역으로 축적한 부를 통해 터너의 작품들을 가장 체계적으로 보관하고 있는 테이트 미술관에 전시된 터너의 작품 <노예선>(‘종호학살사건’이라는 실제 사건을 다룬 작품이다.)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또 그것은 아프리카적인 것과 영국적인 것을 동시에 묻고 답하는 쇼니바레의 작품들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대영제국의 시대와 1,2차 세계대전의 영국 이후에는 또 다른 모습의 영국이 그려진다.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말을 탄생시킨 고도의 복지사회가 종언을 맞이하고 대처의 신자유주의 정책이 펼쳐지고 노동조합의 영향력이 약화된 이후 사회에서 방치된 자들의 대책 없는 삶이 빌링엄의 사진 작품들 속에서 유머러스하게 그려지기도 한다. 또 엘리자베스 여왕과 토니 블레어 총리가 참석한 노예무역금지법 통과 200주년 기념식에 한 흑인 시민이 기념식을 중단시키고 단상을 가로질러 동시대 영국의 ‘인종주의’에 대해 비판하는 장면, 또 시민이 경비원에게 끌려나간 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담담하게 기념식이 이어지는 장면 등도 ‘영국적인 장면’으로 꼽힌다. 이렇게 중첩적인 모습을 모두 담아내는 기록이야말로, 동아시아 변방에서 아직까지도 식민지의 역사를 정리하지 못한 채 혼란의 한국의 독자들에게 가장 맞춤한 영국 기행문이 아닐까 한다.

런던에서 케임브리지로 가던 도중 F가 놀라워하며 말했다. “어? 냄새가 안 나!” 그녀는 2001년 12월 이후로는 영국에 온 적이 없었다. 2001년에 배기가스로 인한 악취 때문에 고생했던 기억이 꽤 강렬했던 듯하다. 오랜만에 방문한 런던은 획기적이라고 할 만큼 매연이 줄어 있었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이번 런던 여행에서 가장 먼저 느낀 감각이었다.(13)

M 선생은 또 이런 이야기도 했다. 자기는 형제가 있는데(쌍둥이라고 들었던 것 같다.) 어렸을 때 전쟁이 시작됐다. 정부는 군사상의 필요로 아시아 문제 전문가를 양성하고자 했다고 한다. “우리 형제는 그 프로젝트에 지원하여 대학에 진학했어요. 누가 중국을 전공하고 누가 일본을 전공할지 정하지를 못해 동전을 던져 앞면과 뒷면에 따라 진로를 결정했지요. 그 결과 나는 케임브리지에서, 동생은 옥스퍼드에서 오랫동안 가르치게 되었어요.”라고.
동전 던지기 운운은 영국인다운 농담일지도 모른다. 나는 ‘아무리 농담이라고 해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온화하고도 독실한, 그리고 겸허하고 유머를 갖춘 노학자야말로 좋건 나쁘건 영국 인문학의 전통을 체현하는 인물상이지 않을까. 이 나라에는 M 선생처럼 일본, 중국, 그 밖의 아시아 여러 나라, 중동,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등을 전공으로 하는 전문가와 석학이 매우 두텁게 존재하고 있다. 옛 대영제국의 판도와도 같이 폭넓게, 유사한 지적 자원의 층이 쌓여온 것이다. 제국이 층층이 쌓아올린 지知의 퇴적이다. 그 저변에 에릭 리델과 같은 존재도 있었다.(61. 63)

색채가 풍부한 ‘아프리카적’인 천을 작품 소재로 사용하는 잉카 쇼니바레의 미술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우리가 ‘아프리카적’이라고 믿고 있는 천은 인도네시아에서 비롯된 납염(밀랍 염색) 기술이 식민지 종주국인 네덜란드에 의해 유럽으로 전해지면서 탄생할 수 있었다. 그 기술을 이용해 영국의 맨체스터에서 디자인된 직물이 대량으로 생산되어 다시 아프리카로 수출된 것이다. 원재료 역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나 동아프리카에서 생산된 코튼이다. 요컨대 우리가 ‘아프리카적’이라고 믿거나 머릿속에 떠올리는 색채와 문양은 실제로는 근대기 식민지 지배 과정에서 종주국이 식민지에 강요함으로써 생겨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쇼니바레는 교수가 바라는 식으로 아프리카적인 미술을 제작하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아프리카적’인 것을 거부하고 ‘영국적’인 것에 동화되지도 않았다. “‘아프리카적’이란 무엇인가?”라는 아이덴티티 자체에 대한 질문을 작품화한 셈이다. 물론 뒤집어 생각해보면 “과연 ‘영국적’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기도 하다.(187, 189)

존 컨스터블이 그린 풍경화를 볼 때마다 나는 ‘이거야말로 영국이다.’라는 생각이 들면서 어쩐지 마음이 차분해지곤 한다. 이를테면 「주교의 정원에서 본 솔즈베리 대성당」 같은 작품.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미술관을 찾아갈 때마다 이 작품과 만나지만, 몇 번을 거듭해서 봐도 질리는 법이 없다.(223)

햄스테드 히스는 광대한 녹지다. 잔디로 뒤덮인 완만한 비탈이 있고(정상에 서면 런던 시가를 내려다볼 수 있다.) 아기자기한 수로와 연못, 아름다운 그늘을 제공해주는 숲, 바로 그곳에 근사한 미술관까지 갖췄다. 편안한 카페도 있다. 머무는 동안 나와 F는 숙소 근처를 산책하다가 조금 더 걸어서 F가 좋아하는 자연주의 베이커리에서 점심 식사를 하는 것을 일과처럼 삼았다. 저녁 무렵에는 어슴푸레한 펍에서 지역 특산 맥주를 마셨다. 실로 ‘이거야말로 영국’이다. 컨스터블의 그림 그 자체처럼.(225)

터너는 왜 「노예선」을 그렸던 걸까. 물론 인도주의 정신과 자신의 정치적 신조를 완수하려는 행위였으리라. 노예제 옹호론자와 대비한다면 그의 인도주의는 대단히 긍정적으로 평가해야 함이 틀림없다. 다만 어디까지나 시대적인 제약과 대영제국의 신민(요컨대 오랫동안 노예제의 혜택과 수익을 누린 자)이라는 틀 안에서였다. 한편 「노예선」을 바라보는 다음과 같은 또 다른 시선도 있다는 점 역시 기억해둘 만하다. “터너는 분명 흑인의 고통 그 자체보다 이토록 비극적 사건을 관련지어야만 훌륭한 바다 풍경화를 그릴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 쪽에 무게를 두었다.”
제작 동기는 인도주의였을까, 아니면 화가로서 지닌 욕망이었을까. 어느 쪽이라고 여기서 확정할 수는 없지만, 내 개인적인 견해는 후자 쪽으로 기운다. 그렇다고 터너를 비난하려는 의미는 아니다. 정치적 신조는 어찌 되었든 그는 예술가로서 단호히 행동했다. 좋건 나쁘건 ‘뼛속까지 화가’였다.
터너의 작품을 가장 풍부하게, 그리고 가장 체계적으로 소장하고 있는 곳이 테이트 브리튼이다. 이 미술관은 설탕 정제 사업으로 부를 축적한 리버풀의 부호 헨리 테이트 경이 자신의 회화 컬렉션을 1889년 내셔널 갤러리에 기증함으로써 만들어졌다. 이렇게 풍요로운 컬렉션과 미술관도 근원을 밝혀보면 노예제와 결부된 대서양 삼각무역이 가져다준 결실인 셈이다. 역설적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그야말로 영국적’이라고 해야 할까.(262)

누워서 천장을 올려다보는 노인의 표정은 마치 철학자나 고매한 스님같이도 보인다. 하지만 실제 모델은 작가의 아버지인 알코올 중독자 레이먼드다. 양팔에 문신을 한 덩치 큰 여성은 그의 부인(즉 빌링엄의 어머니)이다. 부인에게 맞은 남편은 코피를 흘리며 나뒹군다. 잡동사니로 가득한 너저분한 방에는 개와 고양이가 어슬렁거린다. 혼란, 폭력, 그리고 진실…….
“아, 희망이라고는 어디에도 없구나…….” 나는 빌링엄의 사진을 보고 단숨에 매료되었다. 이 또한 영국의 어떤 모습이다. 그때 샀던 사진집의 뒤표지에는 작가의 다음과 같은 말이 적혀 있었다.(265)

이렇게 ‘쿨’한 작품을 제작한 작가도 대단하지만 터너상후보로 노미네이트한 쪽도 만만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터너의 이름을 붙인 상에 걸맞은 작품이다. 그해의 영국 여행에서 돌아온 나는 2004년부터 일본에서 발행되는 잡지 《세카이》에 「디아스포라 기행」이라는 에세이를 연재했다. 집필하면서 「레이의 웃음」에 대해 언급하고 싶어서 도판 저작권 허가를 얻으려고 출판사를 통해 작가에게 연락을 취한 적이 있다. 하지만 원만히 진행되지 못했다. 대리인에 따르면 작가가 “인도인지 어딘지”에 가버려 연락이 닿지 않는다고 했다. 진위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정말 이 작가답다는 생각이 들어 도판 게재는 깔끔하게 단념했다.
시간이 흐른 후에도 종종 ‘빌링엄의 가족’과 만나곤 했다. 예를 들면 도쿄 모리미술관에서 2013년에 열린 「LOVE.아트로 보는 사랑의 형태」라는 전시에서 오랜만에 이 영국 사진가와 재회했다. 영국은 지금(2019년 4월) 유럽연합 탈퇴를 둘러싼 분열과 대혼란 속에 있다. 서민의 고달픈 일상은 이어진다. 알코올 중독자 레이는 지금도 살아 있을까.(267, 269)

‘도의적 책임’에 관해서는 애매하고 넌지시 언급하지만 법적 책임이나 공식 사죄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거부한다. 이것이 현시점에서 전 세계 옛 식민지 종주국이 견지하고 있는 공통된 태도다. 아시아 침략에 대한 일본의 자세 역시 마찬가지다. 블레어 정권은 “영국은 노예무역에 대해 ‘깊은 비통함과 유감의 뜻을 표명’한다.”라고 성명을 발표했지만 공식적으로 ‘사죄’한다는 언명은 없었다. “완전하고도 공식적인 사과를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영국 국교회 지도부와 아프리카계 영국인 일부로부터 제기됐다. 여러 인권 단체 사이에서도 일련의 200주년 기념행사는 기만적이라고 강한 불만이 오갔다. 백인의 공적에 초점을 맞추면서 노예제에 저항했던 흑인의 역할을 경시했으며, 왕실 역시 오랜 시간에 걸쳐 노예무역을 비호했다는 비판이었다. 기념 의전에서 1인 시위를 통해 항의했던 그 사람도 아마 이러한 점을 호소했을 것이다.(257, 259)

목차

책을 펴내며
1. 케임브리지 1
2. 올드버러
3. 런던 1
4. 런던 2
5. 런던 3
6. 케임브리지 2
옮긴이의 말

작가 소개

서경식

1951년 일본 교토에서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나 1974년 와세다 대학 문학부 프랑스문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도쿄 게이자이 대학 현대법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리쓰메이칸 대학  교수인 서승과 인권 운동가인 서준식의 동생으로 방북으로 인해 구속되었던 형들의 석방과 한국 민주화를 위해 활동한 경력이 있다. 이때의 장기적인 구호 활동 경험은 이후 사색과 문필 활동으로 연결되었다.
저서 중 『소년의 눈물』로 1995년 일본 에세이스트클럽상을 받았고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로 마르코폴로상을 받았다. 그 외에 『나의 서양미술 순례』,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 『청춘의 사신』, 『디아스포라 기행』, 『난민과 국민 사이』, 『만남』, 『언어의 감옥에서』, 『시대를 건너는 법』, 『나의 서양음악 순례』 등의 저서가 있다.
2006년 봄에 성공회대학교 연구교수로 한국에 와서 2년간 체류하면서 그간 알려지지 않았던 재일조선인들의 역사와 현실, 일본의 우경화, 예술과 정치의 관계, 국민주의의 위험 등에 대해 열정적으로 기고하고 강연했다. 2012년에 민주주의 실현과 소수자들의 인권 신장에  기여한 공로로 제6회 후광 김대중 학술상을 수상했다. 

최재혁 옮김

도쿄예술대학에서 일본 근대 미술사를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제국과 식민지 사이에서 형성된 시각문화를 경합과 교차라는 관점에서 연구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아트, 도쿄』, 옮긴 책으로 『베르메르, 매혹의 비밀을 풀다』, 『무서운 그림 2』, 『왕의 목을 친 남자』 『인간은 언제부터 지루해했을까?』 『위안부 공격을 넘어서』 등이 있다.

독자 리뷰